IBM -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
2002년. 창업한 벤처를 떠나고 나서 난 4달간 실직상태였다. 방향도 없었고 무엇을 해야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선택하는 지도 몰랐다. 세상과의 담을 쌓고 나는 독서와 마라톤으로 소일을 하고 있었다. 그저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예전 직장 동기인 L에게 자리가 났으니 한 번 지원해보라고 한 건 전혀 뜻밖이었다. 약한 고리 이론이었나? job seeking을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아주 친한 친구보다는 가끔 연락하는 느슨한 인간관계 고리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대부분 job을 구한다는. L도 마음이 맞는 동기이긴 했으나 수개월에 생각나면 한번쯤 연락하는 사이었다. IBM이라.. 게다가 Sales?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서류와 필기를 통과하고 나서 면접을 보러 갔다. 간만에 양복을 입고 나가는 모습을 본 어머니의 기대에 찬 표정이 선하다. 이제 그만 정착해야지... 실직 상태 중에도 별다른 걱정어린 표정을 안지으셨지만 마음은 어땠을지 지금에야 조금 헤아릴만하다.
한 명을 뽑는데 생각보다 경쟁률이 치열했다고 한다. 필기를 볼때는 3-40명 정도가 있었던 것 같고 면접은 5-6명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주 직장을 옮기네요? 성격에 무슨 문제라도?"
"영업은 아주 tough한 잡입니다. 조용한 성격으로 보이는데 잘할 수 있겠어요?"
"Career goal이 뭡니까?"
오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준비한 대답을 했다.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었을까?
"Any questions?"
딱히 준비는 안했지만 그즘 화두가 되었던 HP-Compaq의 합병에 대해서 물어봤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negative한 impact이 예상되나요?
당시 우리 부서의 장이었던 상무님의 대답...
"오토바이 회사 두 개가 합쳐진다고 자동차를 만들 수 있나요? 이제 진검승부를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지금도 이 대답이 선명하게 기억나는건 그분이 복잡한 현상을 매우 알기쉬운 비유로 표현을 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며칠간의 기다림 끝에 다시 big company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6년여 동안의 IBM 생활동안 나는 무엇을 배웠나?
1. 일하는 법.
누구도 이렇게 저렇게 일을 하라고 시키지 않는다. 자기의 role & responsiblity도 결국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이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필요한 리소스를 확보하고 어려움에 부닥치면 escalation을 하고. 이것이 일의 기본이다. 입사하고 2-3년 동안 별다른 ownership이 없는 한국 기업에 비해서 일에 따라 사원이 차장, 부장도 리딩을 하는 경우가 있다. 리딩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attitude가 좋아야 함을 물론 남을 제때에 설득하고 때로는 challenge하는게 반드시 필요하다.
돌이켜 보면 그전까지는 일하는 법에 있어서 나는 아마추어였다. 그저 열심히 일하는. 6년을 생활하면서 아, 일이란 이렇게 하는구나.. 감이 좀 온다.
2. System
"IBM is a system. If you neglect the system, you will lose your job"
IBM에서 boss에게 받아본 이메일 중에 가장 인상깊은 이메일이다. 내용은 단 한줄. sales lead 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자 sales guy들은 당연히 그것을 귀찮아했다. 이게 도대체 내 비즈니스에 무슨 도움이 될까. 지지부진하던 새로운 CRM 시스템 사용현황을 본 우리 부서의 장은 이 메일 한통으로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큰 회사일수록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운영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야 사람에 대한 dependency가 없어지고 사람이 바뀌더라도 언제라도 회사는 goal에 따라 움직인다.그러나 이를 절대화하면 개인들은 수동적으로 그냥 따르기만 하고 개선이나 창조를 하지 않는다.
전세계 150개국에 진출한 IBM이 global operation의 모범사례로 항상 나오는 것도 결국은 이 시스템의 힘이다. 다른 나라 직원들과 미팅할때 짧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은 목표가 분명하고 이것을 동일한 시스템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이름이나 role의 명칭이 동일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요한 이니셔티브들 역시 CEO부터 말단 직원까지 잘 이해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참 무서운 조직이다.
사장이나 주요 임원들이 만약 1년간 없다면? 그래도 IBM은 돌아간다. 왜? 그것이 바로 시스템의 힘이다.
3. 변화
6년 동안 나는 3가지 다른 일을 했다. 그때마다 배우는 것이 달랐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90년대 말 포레스터 리서치의 부사장이 썼던 책 이름이었던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항상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찾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그 저변에는 외부환경에 항상 적응해 갈 수 있는 조직과 시스템의 힘이 역시 존재한다. 왜 5년, 10년 장기 플랜이 없을까? 처음 IBM에서 일을 할 때 참 궁금했는데 지내다 보니 1년 후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5년 이후 비즈니스 플랜을 세운다는게 참 공상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중요한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는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고, 개개인들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attitude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벤처를 하면서 5년 비즈니스 플랜을 세웠던 게 생각난다. 그 내용들을 다시 돌이켜보면 거의 공상소설 수준이다.
아쉬움도 많이 남지만 참 즐거웠고 내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좋은 터전이었다. SSL의 긴장감, 사람들의 향기,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 가끔 그 시절이 무척 그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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